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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스크랩]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2026. 6. 27. 10:5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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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 도종환 - 교보문고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격랑의 복판에서 오롯이 고결한 영혼, 한국 서정시의 거목 도종환 기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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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아직도 다 알지 못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와준

고마운 내 인생을 향해 편지 한장 쓰는 밤

별을 올려다보는 밤이 깊다


날이 흐려도 녹색 잎들은

흐린 허공을 향해 몸을 세운다


버려야 할 말이 얼마나 많았는가

세상을 속이는 현란한 기술은 얼마나 넘쳐났는가

부끄러움이

언제부터 이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활보했는가


고요를 따라 멀리 순례라도 떠나야겠다

나를 데리고

눈 내리는 적요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겠다

세상은 갈수록 경박해지고

나도 자주 갈피를 못 잡곤 했다

고요가 나를 지워줄 것이다

고요의 존엄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원수와도 하루에 몇번씩 악수하고

나란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같은 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재난 속에서도 부디 마음을 추슬러

삭막해진 마음을 먼저 꺼내놓지 말고

온기를 살며시 꺼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려운 이에게 내 지닌 걸 슬며시 밀어놓는 손길이

내게서 먼저 시작되기를 바란다


먼저 진 잎들은 조용하다

나무에 매달려 안간힘 쓰며

바람과 실랑이를 벌이는 잎들은 소란하지만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나무는 안다

바닥으로 떨어진 잎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런 불안은 시간에게 주면 된다

나무는 지금부터 마지막까지를

가만히 받아들인다

나무가 지닌 미덕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순간순간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힘든 날

가을 나무 있는 데까지 걸어갔다 온다


고마운 일 2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어려울 때마다 상의할 사람 있다는 것

아직도 마음이 뜨겁다는 것

간절할 때마다 달려갈 곳 있다는 것

아직도 별을 우러러본다는 것

외로울 때마다 바라볼 곳 있다는 것


밤바람 몰아치는 험한 세상에

별 같은 네가 있어 보잘것없는 내가 산다

꽃 같은 네가 있어 외로운 내가 산다


네 사랑도 어김없이 가을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열매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열정은 절정에서 단풍으로 바뀌고

사랑으로 출렁이던 잎들이 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저녁이 올 것이다


거기까지가 사랑이다

봄에서 겨울까지

사랑은 너를 데리고

그 계절들을 다 지나가게 될 것이다


꽃 피는 시절에는 허영에 들뜨지 않고

푸른 잎 무성할 땐 겉넘지 않고

열매가 찾아올 땐 자신에게 충실할 줄 알면

찬 바람 몰아칠 때 비굴하지 않다고


흔들린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것은

존재 자체

거기 그렇게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게 얼마나 많은지


이쁜 날들은 갔어

그래도 널 사랑해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아니까


진정으로 아름다운 산은

겨울에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 생의 겨울에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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