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2024. 12. 7. 23:53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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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 술을 사준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그곳이 '학생회'임을 알게 된다. 뭐 학생회가 별거겠냐 싶어. 주는 학생회의 깃발을 받고, 혹시 뭔가 날아오면 피해야 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듣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나아갔다. 정확히는 한나라당 당사였던 것 같다.
한나라당 해체! 한나라당 해체!
결국 나는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커서 큰 이쁨을 받고, 학교로 돌아와 족발에 소주를 얻어먹고, 친구 자취방에 들어가 집들이 선물로 사들고 간 초코파이를 결국 내가 안주로 먹었다는 추억만을 남긴 채 5년 뒤 슬픈 일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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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광우병 사태. 모두들 그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가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소통하지 않는 정부'가 핵심이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5월 24일 밤. 나는 구로디지털단지에서 야근... 아니 새벽 근무를 하다가 팀장 형과 세종대로로 향했다. 이제는 달려간 이유가 잘 기억이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당시 언론들이 차단되고 있다는 찌라시 아닌 찌라시를 보고 달려갔었다.
새벽 2~3시경 달려간 세종대로는 말 그대로 토론의 장이었다. 그 당시에 나름 지식인인 줄 알았던 진중권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계남 아저씨도 봤던 기억이 있다.(아, 명계남 아저씨 본 건 이 때가 아닌가...? 아무튼, 팀장 형 결혼식 주례를 볼 줄이야.)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에 우리는 다시 바쁜 마감을 해치우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왔고, 그날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던 시민들은 결국 MB 출근길의 방해가 된다며 치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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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랑스러운 나라의 국민이란 게 무엇인지 느꼈던 짧은 5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지금 나는 무슨 시간을 살고 있는가 혼란이 온다. 사실 남보다 나를, 나의 가정을 더 돌보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빠듯한 요즘이다. 그래서 정치란 어느새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듣는 그저 그런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 라디오 프로그램마저 폐지되어 유튜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언젠가 자정작용을 할 거라는 생각에 외면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미친놈이었을까. 이번 주 폭풍 같은 사건들을 겪으며 2008년과 같은 뜨거워짐을 느낀다. 20년 전의 나는 탄핵을 반대했었고, 20년 후의 나는 탄핵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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