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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스크랩] 지도로 보아야 보인다

2025. 8. 1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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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아야 보인다 | 에밀리 오브리 - 교보문고

지도로 보아야 보인다 | 지도로 세상을 보는 것은 사진이나 드론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지도는 지정학적 격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지도로 볼 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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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이란 전쟁을 막을 또 하나의 방법이다.” - 지리학자 이브 라코스테(Yves Lacoste)

 

유럽

러시아

러시아의 대외정책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을 1991년에 해체된 소련의 계승자로서 스스로 강대국이라 여기고 있다는 사실부터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러시아는 구소련 공화국들을 여전히 자신들의 직접적이고 불가침적인 세력권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들을 ‘가까운 이웃’이라고 부른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자국 영토를 수호하는 데 있어 완충지대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적 발상지로도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가 가진 주된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민주주의의 결여와 현 집권 세력이 가진 정권 교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독일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로, 각각의 주는 자체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내부 조직에 있어서도 커다란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재통일과 함께 유럽에서 독일의 ‘무게감’ 역시 커졌다. 35만 7천 제곱킬로미터의 면적과 8,3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다. 또한 2019년 독일의 GDP는 유럽연합 28개국 GDP의 20%에 해당하는 3조 4,360억 유로를 기록하면서 독일을 유럽 대륙 최고의 경제대국이자 세계 4위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려놓았다.

 

나치즘의 유산은 독일이 지정학적 야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독일은 오로지 경제적인 힘만을 추구할 수 있었다.

 

유럽연합은 독일의 대외정책에서 최우선 순위에 속한다. 독일은 유럽연합의 여러 기관이 설립된 이래로 그 중심에서 서쪽의 이웃 국가들과 협력하고 있다. 또한 유럽연합의 최대 공헌국으로 유럽연합의 여러 제도(유럽중앙은행, 도이치 마르크화를 본뜬 유로화 등)를 만들었다.

 

냉전이 종식된 이래로 독일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럽의 중심에 있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유럽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경제적 힘이 더해지면서 독일은 이웃 유럽 국가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은 독일이 맡고 있는 유럽연합의 ‘경제적 리더’라는 위치와 독일의 무역흑자를 비난하면서 독일산 자동차와 알루미늄의 관세를 인상하기까지 했다. 또 군사적으로는 독일이 방위비를 인상하지 않고 미국의 보호에 기대고 있다며 비난했다.

 

2016년 이후 독일의 최대 교역국이 된 중국과의 긴장 역시 점점 고조되고 있다. 중국은 독일의 기술을 대량 수입해 오는 대가로 독일 내 5G 설치 또는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고속철도 구축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의 이 거대한 철도 프로젝트의 종착역 중 하나가 유럽 최대 규모의 하항(하천 연안에 발달된 항구)인 독일의 뒤스부르크인데 미국은 이를 매우 언짢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중국의 홍콩 민주화 시위대와 위구르족에 대한 탄압, 대만에 대한 위협을 비난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독일은 이제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와 같은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한다.

 

스웨덴

북에서 남까지 이르는 거리가 1,500킬로미터가 넘는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국가 중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갖고 있다. 바로 이 해안지대에 대부분의 대도시와 주요 교통 및 운송로들이 집중되어 있고 인구 또한 몰려 있다.

 

스웨덴은 경제적으로는 서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중립주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강력한 방위산업을 발전시켰다. 이 나라의 거대 산업체들은 스웨덴을 세계의 주요 무기 판매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 스웨덴의 강력한 군사력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두려움, 즉 ‘러시아에 대한 공포’의 대비책이었다.

 

폴란드

폴란드는 북유럽 대평원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외세의 침략에 더욱 쉽게 노출되었고 두 번이나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첫 번째 소멸은 18세기 말에 일어났다. 이웃 강대국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분할통치했고 1795년에는 이 나라를 완전히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폴란드의 두 번째 소멸은 1939년 9월에 일어났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폴란드 군대가 퇴각한 지 며칠이 지난 뒤 소련군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에 따라 폴란드의 동부를 점령했다. 이 재빠르고 노골적인 점령과 프랑스와 영국의 불간섭은 많은 폴란드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폴란드는 나치와 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

 

폴란드는 중부와 동유럽의 다른 국가들(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동독 등)에서 이루어졌던 것과 꽤나 비슷한 양상으로 향후 40년 동안 소련의 세력권에 속하게 된다. 또한 1948년에 설립된 공산당은 1989년에 해체되기까지 폴란드의 실제적인 권력기관으로 존재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경제의 국유화, 산업의 국영화, 공유화된 막대한 농지에 대한 급진적인 토지개혁, 러시아와의 군사 동맹 등이 진행되었다.

 

1989년 4월 17일 마침내 자유노조의 활동이 합법화되었고 창립자 바웬사는 1990년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민주주의 국가가 된 폴란드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폴란드는 여전히 이웃 국가인 러시아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999년 폴란드는 나토에 가입했고 뒤이어 들어선 정부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동조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군수품을 사들였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MD)의 일부를 자국 영토에 배치하는 것을 수용했다.

 

폴란드의 이러한 친미적 성향은 특히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면서 유럽의 안보 체계를 잠정적으로 해치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연합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EU

유럽연합(EU)의 탄생은 1951년 독일(당시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 이루어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이를 통해 새로운 전쟁을 피하고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에 맞서 함께 힘을 합치고자 했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진정한 시작은 1957년에 체결된 로마 조약에서 비롯되었다. 이 조약으로 유럽연합의 모태가 되는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설립되었고 유럽의 식량 수요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농업정책(CAP)과 함께 공동 시장 정책이 시행되었다.

 

포르투갈, 스위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과 함께 영국은 1960년대에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 신청을 결정한 후 1973년 1월 1일 덴마크, 아일랜드와 함께 가입했다.

 

1981년에는 그리스가 열 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합류했다. 이들 세 국가의 가입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무엇보다도 이들 국가는 극우 군부 독재(그리스의 군사 정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정권)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정식 명칭은 유럽연합조약)은 유럽경제공동체를 유럽연합(EU)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조약은 특히 각국의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가 아니어도 거주하고 있는 곳이 유럽연합 회원국이라면 그 나라의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유럽연합 시민권’을 도입하면서 ‘시민의 유럽’이라는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또한 2002년 1월 1일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유로화, 공동외교안보정책(CFSP), 형사문제의 경찰및사법협력정책(PJCC) 등도 탄생시켰다. ‘공동의 결정’이라는 절차를 통해 유럽의회의 권한도 강화되었다.

 

1995년 유럽연합은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를 받아들였고 이후 2004년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8개국과 지중해의 섬국가인 몰타와 사이프러스까지 회원국이 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가입하면서 유럽연합은 대서양에서 러시아 문턱까지, 발트해에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28개 회원국을 보유하게 되었다.

 

유럽연합의 제도적 위기는 2007년 리스본 조약으로 절정에 달했다. 리스본 조약은 유럽헌법의 조항들을 담고 있으며 당시 27개국(2013년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제외)으로 확장된 유럽연합의 역할을 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의회를 통해 비준했다. 시민의 의사 표현을 피한 이런 비준 방식은 유럽에 민주주의가 결여되었다는 유럽회의론자들의 비판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유럽 국가들이 국가부채라는 어려운 문제를 현명하게 다루지 못했다며 비난

 

난민 수용 문제나 국경 통제에 제대로 된 공동의 정책을 수립하지도 못했다.

 

권위주의적으로 변한 이들의 행보는 오늘날 폴란드와 헝가리를 ‘비자유주의 민주국가’로 만들었다. 이는 이들 국가의 수장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지만 국민들은 점점 더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아메리카

브라질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브라질의 국토는 850만 제곱킬로미터로, 면적으로는 세계 5위

 

개발되고 있는 광물의 종류만 50여 가지에 달한다. 또한 탄화수소 매장지의 거의 전부가 해저에 위치해 있고 2006년부터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황

 

오렌지, 사탕수수, 커피 원두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며 대두 생산은 세계 2위

 

아랍 연맹 국가로 할랄 육류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국가

 

브라질에서 불평등이 지속되는 이유는 국토의 극심한 불균형과 밀접하게 연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와 함께 유럽연합을 본보기 삼아 만든 남아메리카 경제 공동체인 ‘메르코수르’를 결성

 

메르코수르는 남미 대륙 GDP의 82%를 차지하며, 유럽연합과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무역 블록

 

멕시코

멕시코가 가진 주요 이점은 에너지 자원, 관광 유산, 그리고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인 미국과의 지리적 인접성이다.

 

1960년대부터 3,200킬로미터에 달하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따라서 쌍둥이 도시들(샌디에이고와 티후아나와 같이 양쪽 나라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도시)이 발전했다. 북부 국경지대에 조립 공장이 들어설 수 있는 산업지구(스페인어로는 마킬라도라)를 설립한 것은 멕시코의 산업 발전을 도왔지만, 값싼 노동력과 세제 혜택(관세 철폐, 면세)에 매력을 느낀 북미 산업계는 멕시코를 하청업체로 둔갑시켰다.

 

관광업은 매년 멕시코에 20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주는, 멕시코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 분야

 

팬데믹 관리를 위해 차출된 군사로 인해 마약 카르텔은 전에 비해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고 종종 정부의 빈자리를 메우기도 했다. 그렇게 세계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새로운 충성고객을 확보하고 사회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빈곤층에게 식료품을 나눠주고 대출을 해주는 진풍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멕시코 정부가 2020년 말 미국으로부터 마약 밀매를 의심받은 전 국방장관 살바도르 시엔푸에고스에 대한 기소를 중지한 사건은 이 나라 정부가 과연 마약상과의 전쟁을 벌일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는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볼리바르식 사회주의 혁명’을 내세우며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베네수엘라를 이끈 대통령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19세기 스페인 식민 지배로부터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키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그 이후로 베네수엘라의 공식 국가명은 그의 이름을 딴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이 되었다.

 

남미 대륙의 북서쪽,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베네수엘라는 북쪽은 카리브해를 향해 있고 오리노코강 남쪽으로는 거대한 아마존 열대우림이 펼쳐져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면적을 합친 것만큼 큰 베네수엘라의 영토는 91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며 인구는 총 3,100만 명으로 추산

 

베네수엘라의 인구가 북부에 집중되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바다를 통해 유입되었고, 또 1914년에 북서부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석유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핵심

 

석유 매장량은 전 세계의 17.6%로 사우디아라비아(15.6%)와 캐나다(10%)보다 앞서 있다.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다른 경제 분야는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원유를 휘발유로 정유하는 분야마저 발전하지 못했다.

 

메르코수르 회원국(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들은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베네수엘라 정권을 규탄하며 메르코수르에서 퇴출시켰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금융 및 정치적 제재를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2019년부터 시행된 베네수엘라산 석유에 대한 금수조치도 포함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 모든 패를 뒤집어야 했다. 러시아산 탄화수소에 대한 금수조치로 인해 발생한 에너지 부족을 메우기 위해 베네수엘라산 석유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껏 고립되어 있던 마두로의 눈부신 복귀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에 반기를 든 마두로 정권을 지지할 이유가 충분한 중국과 러시아

 

중국은 현재 베네수엘라의 최대 채권국으로, 5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거나 대출해 주었으며 광산 혹은 석유 채굴권으로 직접 상환을 받고 있다. 게다가 유가가 하락하면서 중국으로 이동하는 원유의 양 또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는 현 시대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다. 바로 지구상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남미 대륙에서도 중국의 영역 표시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

중국

지리적 불균형은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중국이라는 국가를 만든 체제가 동쪽 지역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건륭황제는 1735년부터 ‘18개 성’이라 불리는 한족의 중부 지역을 떠나 변방 영토인 만주, 몽골, 투르키스탄(신장), 티베트, 사할린 그리고 현재의 대만인 포모사섬을 정복하러 나섰다. 따라서 많은 중국인들은 이 변방의 영토를 자연스레 자국의 일부로 여긴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대한 야심 또한 점점 키우고 있다. 중국이 이 해상 지역을 전략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이곳이 최근 50년간 세계 경제 성장의 중심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는 지구상의 주요 해상 항로들이 교차하는 곳으로 세계의 공장인 중국으로서는 필수적인 곳이다.

 

이 두 해상으로 세계 교역량의 3분의 1이 이동한다. 세계 최대의 항구 10곳 중 8곳이 이곳에 위치

 

이 지역은 수산자원 또한 풍부하다. 중국은 단연 최대 수산물 소비 국가이자 최대 어업 국가다. 그리 깊지 않은 이곳의 해저에는 광물과 희토류 또한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에 출범한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60개국 이상을 잇는 육로(도로, 철도, 가스관, 송유관 등)와 해로를 건설하는 동시에 현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한 중국의 목표는 천연자원과 원자재 수급을 확실하게 보장받고, 수출을 안정화하고, 새로운 교역 기회를 확보함과 동시에 전 세계에 정치적, 경제적 동맹을 만듦으로써 역동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일본

일본의 발전 모델은 전적으로 외부 세계와의 경제적 교류에 초점

 

오늘날 일본은 미국, 영국, 독일 다음으로 개발을 위한 공적 원조를 가장 많이 제공하는 국가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2011년 이후 연간 1%대(중국은 평균 7.5%)에 머무르면서 부진을 겪고 있는 한편 부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국가채무는 오늘날 GDP의 230%에 달한다.

 

홍콩

뉴욕, 런던 다음으로 세계 3위의 금융 중심지이지만 홍콩 은행들의 불투명성은 주기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홍콩으로 향하는 해외 투자금의 주요 출처는 대표적인 조세 피난처인 케이맨 제도(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 제도)와 버진 아일랜드다.

 

1960-70년대부터 발전한 섬유 산업과, 풍부한 노동력 덕분에 수출품의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할 수 있었던 전자 산업 또한 홍콩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이외에도 매년 10만 명의 중국 농민들이 빈곤을 피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1945년부터 1980년 사이 홍콩의 인구는 60만 명에서 5백만 명으로 여덟 배 가까이 증가했다.

 

1984년 2년에 걸친 협상 끝에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중국에 홍콩 통치권을 돌려주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홍콩이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최소 50년 동안 자유주의 정치 체제를 지닌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국양제’라는 유명한 표현이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중국과 영국의 협상에 따라 홍콩은 ‘절반의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

 

2016년에는 중국 선전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홍콩의 약 두 배에 달했다. 10년 동안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보인 선전과 광저우는 오늘날 홍콩보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해 내고 있는 반면, 홍콩은 경제적 역동성이 줄어들면서 노후화되고 있다.

 

인도

인도는 상위 1% 인구가 국가 전체 부의 42.5%를 독점하고 있다. 즉 인도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보였지만 인도인 5명 중 1명은 아직도 빈곤층에 속한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인도는 1947년에 독립한 법치주의에 기반한 의회 민주주의 국가다. 인도의 헌법은 종교의 차별 없이 모든 시민의 평등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

 

2014년부터 극단적 힌두교 민족주의자이며 힌두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모디 총리가 인도를 통치

 

아세안의 몇몇 국가들은 인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부상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인도는 일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한 반격으로 인도와 일본은 ‘자유 회랑’이라는 이름의 대안 정책을 시행했다. 바로 이 아시아-아프리카 성장 회랑을 기반으로 인도는 스스로 해당 지역의 초석이 되고자 한다. 이처럼 인도와 일본은 군사적, 경제적 협력을 펼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76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가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나라

 

국가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에 의지하고 있다. 1951년에 체결된 태평양안전보장조약(ANZUS)이 양국 군사 동맹의 초석이 되었다. 본래 이 조약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견제하기 위해 탄생했지만 이후 냉전시기에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정책에 맞게 적용되었다. 또한 이 조약은 세 국가(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태평양 지역의 안보 문제에 대해 협의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한다. 그렇게 미국은 냉전을 이용해 영국을 대신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보호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전설로만 여겨진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미지의 남쪽 땅)’에 처음으로 상륙한 사람은 1606년 네덜란드 항해사 빌럼 얀스존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 지배가 시작된 것은 1770년 제임스 쿡의 항해 이후였다. 20세기에는 천연자원이 발견되면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캔버라가 수도로 채택된 것은 시드니와 멜버른 둘 중 하나로 결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자국의 안보는 미국에 맡겼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지리적으로 훨씬 더 가까운 중국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국이 된 것이다. 거대한 중국의 수요는 오스트레일리아 경제를 끌어올렸고 덕분에 2018년에는 3%에 가까운 연간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세계 13위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랐다. 또 2015년에는 두 나라 간에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면서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역은 2015년부터 2019년 사이에 실질적으로 25%나 상승했다.

 

남태평양에 대한 중국의 욕심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충직한 동맹국인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결과 2018년 말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파푸아 뉴기니의 마누스섬에 합동 해군기지를 신설하기로 발표했다.

 

새로운 인도-태평양 동맹을 통해 미국과 중국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두 국가인 일본과 인도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중동

이란

이란은 아리아인들의 국가지만 정체성과 단일성의 뿌리는 페르시아에 있다. 오랜 역사 동안 이란이라는 국가는 변방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인(16%), 쿠르드족(10%), 루르족(6%), 아랍인(2%), 발루치족(2%), 튀르키예 및 투르크멘족(2%)이라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통합하면서도 페르시아인과 페르시아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오늘날 이란의 8,300만 인구 중 61%가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통치하지만 실제 권력은 최고지도자(이슬람교 지도자로 주요 국정 운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에게 있는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는 이란은 이러한 정치 형태를 이슬람 세계 전체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이란 혁명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중동 지역을 혼란에 빠트렸고 이란과 이웃 아랍 국가들, 또 이란과 미국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야기했다.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2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미국과 서방 국가에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무기 덕분에 ‘걸프만의 경찰’ 노릇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9년 11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이란 혁명주의자 대학생들이 일으킨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은 상황을 반전시켰고 양국 간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1980년부터 이란에 제재를 가했다.

 

길고 긴 협상 끝에 비로소 합의점에 도달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2003-2015년) 동안 이란의 핵문제는 중동 지역에서 여러 갈등을 조장했다. 결국 2015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란과 오바마 행정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독일이 핵합의를 체결하게 된다. 이 합의에서 이란은 농축 우라늄 저장량을 줄이는 대가로 일부 제재의 해제를 얻어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면서 문제가 제기되었고 2018년 트럼프는 ‘불공정’하다는 이유를 들며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이제 막 해제된 대이란 경제 제재들을 부활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은 미국의 이 같은 결정을 반겼다.

 

사우디아라비아

18세기부터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엄격한 이슬람교로의 회귀를 설파한 이슬람 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도움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들을 정복하고자 했다. 사우드 왕가의 군사력과 와하브파의 이데올로기 연합은 또 다른 말로 ‘칼과 코란’이라고도 불리며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나라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연합은 문자 그대로의 성서 해석, 대중적 이슬람의 거부, 빈번한 성전 촉구라는 특징을 가진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또 다른 정체성은 오랫동안 세계 1위를 고수했으며 오늘날에는 베네수엘라의 뒤를 잇는 탄화수소(석유의 주원료) 매장량(세계 매장량의 22%)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동부의 하사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탄화수소는 본래 아라비아 반도의 번영을 이끈 원천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는 수도 리야드이지만 왕국이 가진 권력의 원천은 역동적인 두 지역인 헤자즈와 하사에 있다.

 

국가 예산의 83%가 석유 수출로 인한 수입에서 발생한다. 석유로 벌어들인 수입은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관대한 복지국가의 자금줄이 되어주는데 국가는 이를 활용해 국민에게 무상 교육, 무상 의료, 공공분야 일자리 등을 제공하고 주거, 식료품, 에너지에 대한 보조금도 지원한다.

 

시리아

시리아는 지중해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튀르키예, 동쪽은 이라크, 남쪽은 요르단, 서쪽은 이스라엘 및 레바논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시리아 경제는 2011년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경제활동인구의 25%가 종사한 농업에 주로 의존했다. 양이 감소하고 있기는 하지만 석유가 국가 수입의 4분의 1을 담당했다. 1960년대부터 국가 주도로 발전한 산업은 정유, 인산염 처리, 시멘트 제조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

 

1920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1946년에 독립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2000년대에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자유화를 펼쳤는데 이로 인해 특히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이득을 보았다. 그중에는 은행, 이동통신, 석유, 건설 분야에서 국가 최초의 민간인 투자자가 된 대통령의 사촌 라미 마클루가 있다. 나머지 국민들은 발전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권좌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그렇게 민중의 봉기는 내전으로 바뀌었다. 알 아사드는 민중을 상대로 전차, 헬리콥터, 전투기, 심지어 탄도미사일까지 동원했다. 그는 민간인들의 정상적인 삶을 방해할 요량으로 반군이 점령한 지역 안에 있는 빵집, 식량 창고, 병원, 학교 등을 겨냥하여 폭탄을 투하했다.

 

시리아 내전은 5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화학무기 공격, 대량 학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가 주로 시리아 정권, 그다음에는 IS에 의해 자행되었다. 또한 시리아 국민 7백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 이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유엔은 8백만 명에 가까운 시리아 국민이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고 집계했는데 이는 남은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튀르키예

국토의 95%가 아시아 대륙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지리적 입지는 튀르키예를 유럽, 지중해, 튀르키예 언어권, 아랍 세계가 교차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튀르키예 대외정책의 쇄신에는 국제관계 전문가이자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학자 출신 아흐메트 다부토글루의 공이 컸다. 다부토글루는 모든 이웃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면서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이고 지정학적인 입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웃들과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이 나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3백만 명 이상의 시리아 국민이 국경을 넘어 튀르키예로 피난을 왔고 튀르키예의 젊은 광신도들은 IS나 알누스라 지하디스트 민병대에 가담하기 위해 시리아로 넘어갔다.

 

튀르키예는 언제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자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이득을 취하는 데 능숙하다. 나토 회원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에르도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수완을 증명했다.

 

이스라엘

1948년 5월 14일 유대 국가 건국위원회 의장이자 새롭게 수립된 유대 국가의 초대 총리가 된 다비드 벤구리온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서부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1949년 전쟁이 중단되었을 때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스라엘의 경계를 나누는 전선에는 ‘그린라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통제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통제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경제는 첨단기술(항공, 전자, 통신, IT, 소프트웨어, 바이오기술), 관광, 금융, 인근 해역에서 발견된 천연가스 등이 주요 동력이다. 경제활동인구의 약 10%가 첨단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디지털 보안, 데이터 관리, 사이버 분야 등 기술 관련 수출 또한 막대한 수준에 달한다.

 

첨단기술 분야를 제외한 업종들은 임금 수준이 낮고 생산성도 매우 낮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불평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을 보인다. 국민의 5분의 1에 가까운 인구가 빈곤 한계선 아래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엔 아랍인들과 극단적 정통 유대교도들이 속해 있다.

 

아프리카

알제리

240만 제곱킬로미터에 가까운 면적을 가진 알제리는 수단이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된 이후로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국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인구는 4,200만 명으로 99%가 무슬림이다. 인구 대다수가 아랍어를 사용

 

지중해로 둘러싸인 북부 지역은 길이 1,200킬로미터, 너비 약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지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온난한 기후 덕분에 알제리의 3대 도시인 오랑, 알제, 콩스탕틴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세 도시에 알제리 인구 약 90%가 모여 살고 있다. 그 밖에도 전혀 다른 환경의 두 지역이 존재하는데 한 곳은 산악 지역과 반건조 기후의 높은 고원지대이며, 다른 한 곳은 국가의 3분의 2를 뒤덮고 있는 사하라 사막이다. 사막 지역은 탄화수소뿐만 아니라 풍부한 광물 자원도 보유하고 있다.

 

탄화수소가 알제리 전체 수출의 98%를, 국가 소득의 60%를 차지한다. 따라서 탄화수소는 알제리의 주요 ‘연금’인 셈이다. 하지만 의존도가 높은 만큼 유가의 변동에 따라 경제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알제리의 경제는 역사적으로 뛰어났던 농업(포도, 곡물, 감귤류 등)과 성장하는 석유 산업이 지탱하고 있었다. 석유는 국가 산업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다.

 

내전은 10년 동안 이어지면서 20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관광 지역 개발이 중단되었고 그 결과 알제리는 오랫동안 여행객들이 꺼리는 나라가 되었다. 현재는 홍보 부족과 관광 비자 발급의 어려움, 관광 인프라 부족 등이 겹쳐 더 힘든 상황이다.

 

튀니지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년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지중해 해안가로 펼쳐진 튀니지의 긴 모래사장을 찾았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 튀니지는 관광업을 위해 길게 늘어선 대규모 해변 휴양지들을 개발해 왔는데 이는 해안 지역과 나머지 지역 간의 구조적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튀니지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 최초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국가였고, 1861년에는 역시 이슬람 국가 최초로 입헌군주제 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막대한 국가부채로 인해 알제리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에 내정간섭을 허용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알제리 영토 침공을 빌미로 튀니지를 기습했고 1881년에 튀니지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튀니지는 IS에 전투원을 가장 많이 보급한 국가가(러시아 다음으로) 되었다.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의 국토 면적은 112만 7천 제곱킬로미터가 넘는데 이는 프랑스의 두 배가 넘는 크기다. 인구수는 약 1억 1천만 명으로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 다음으로 많다.

 

1930년 하일레 셀라시에 1세라는 이름으로 군림했던 ‘왕 중의 왕’ 타파리 마코넨은 황제가 되자마자 봉건국가에 머물러 있던 에티오피아의 사회적, 경제적 근대화를 위한 광범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하지만 토지개혁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법령도 공포했고 1931년에는 최초의 성문 헌법도 만들었지만 이는 단 한 번도 적용되지 않았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최초의 초등학교, 대학교, 병원, 에티오피아 항공사, 라디오, 텔레비전, 근대식 군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55년 헌법 개정을 통한 자유화에도 불구하고 셀라시에는 여전히 독재적이고 억압적이었다.

 

결국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1974년 9월 12일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44년이라는 긴 즉위 기간 동안에 그는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과 함께 국제무대에 끼친 영향으로 20세기 아프리카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대외정책도 매우 활발히 펼쳤다. 1963년 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둔 아프리카통일기구(현재의 아프리카연합)를 창설한 것도 그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유엔의 평화유지군으로, 이후에는 아프리카 연합군으로도 참전했다. 오늘날에는 소말리아와 수단에 군대를 파병하고 있다.

 

동아프리카의 지하디즘(이슬람 근본주의 무장투쟁)에 대항하는 방패막이 역할도 하고 있고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수단, 남수단 등의 분쟁 국가에서 발생한 약 73만 명의 난민들도 수용하고 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소령이 재빨리 권력을 잡았다. 멩기스투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책은 특히 경제 국유화와 토지 재분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소련은 이러한 변화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소련이 아프리카의 뿔 해안지대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관문으로서 에티오피아가 전략적, 지정학적 동맹이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

 

1990년대에는 평균 2.5%에 불과했던 경제성장률이 2000년대에는 8.4%, 2010년부터 2018년 사이에는 9.7%로 상승했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생활수준은 향상되지 못했다. 국민 1인당 GDP는 여전히 낮았고(2024년 예상은 약 1,787달러) 인플레이션도 여전히 높았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거시 경제 안정성에 커다란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력발전소 건설로 하류로 갈수록 강물 유입량이 감소하는 탓에 지금까지 나일강의 혜택을 받아온 인근 국가들(이집트와 수단)과 마찰이 발생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채권자는 대부분 중국이다.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에티오피아에 대대적으로 투자했고 2000년 이후 에티오피아는 중국으로부터 12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빌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로만 본다면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앙골라 다음으로 중국의 차관을 많이 받은 국가가 된다.

 

말리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말리는 사헬 국가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영토를 지닌 국가에 속한다. 사헬이란 아랍어로 ‘해안’을 뜻한다.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과 경계를 이루는 반건조 기후 지역이, 남쪽으로는 열대우림이 펼쳐져 있다.

 

말리의 문화교육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바마코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사 은디아예에 따르면, “독재 정권의 후유증이 아직도 제도와 가치 체계 속에 가시적으로 남아 있다. 독재 정권 시대의 유물처럼, 인맥은 능력과 재능보다 우선하며 부정부패는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말리 국민들은 테러로 인한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자 30여 년 전에 획득한 민주주의적 자유는 더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먹고사는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씁쓸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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