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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스크랩] 집단 착각

2025. 8. 11. 17:02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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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착각 | 토드 로즈 - 교보문고

집단 착각 | 다수의 선택은 길잡이인가, 눈가리개인가 17세기 튤립 광란부터 정치 양극화, 세대 갈등의 이면까지 사회·정치·경제를 지배하는 생각의 함정을 경계하라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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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의 함정

벌거벗은 임금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사회적인 동물이며 다른 이가 지켜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행태에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행동을 조율하고 싶은 충동, 사회학자들이 흔히 ‘순응 편향conformity bias’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생물학적 본능이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뇌는 우리가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반응한다. 그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사회학자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William Isaac Thomas와 그의 부인인 도로시가 1928년 제시한 이른바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는 다음과 같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해, 주근깨가 났고 한쪽 발로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우리가 마녀라고 믿는다면, 혹은 코로나19로 인해 화장실 휴지가 남아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에 실질적인 근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러한 믿음에 따른 결과만큼은 현실화될 수 있다.

 

스스로 판단할 만큼 충분하고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확신을 품지 못할 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추종할 때 우리는 따라쟁이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검증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특히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우리보다 더 나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지표로 삼으려 든다. 우리는 우리가 사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식과 견해가 옳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행태를 모방함으로써 그 차이를 메우고자 하는 것이다.

 

막 걸음마를 뗄 무렵 우리는 호기심을 느낀다. “저 난로 뜨거울까?” 그리고 우리는 그걸 직접 확인하는 대신, 근처에 있는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답을 찾곤 한다. 모든 의문을 어려운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되니, 이러한 사회적 학습법은 우리 인류에게 연령대를 불문하고 매우 유용한 것이다.

 

공유된 행동은 증폭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순응을 기본 태도로 장착하면서, 우리는 개인에서 집단의 구성원으로 변모한다. 이렇게 심어진 오류의 씨앗이 발아하게 되면, 모든 지식을 뒤덮어버린 채 오직 집단 착각만을 남겨놓는 연쇄 반응과 무한 복사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언제나 연쇄 반응의 수동적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첫 행위자를 모방하면서, 특히 첫 행위자를 모방한 첫 번째 추종자가 되면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집단 착각을 형성할 뿐 아니라 굳건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오곤 하는 것이다.

 

“왜?”라고 묻는 것은 우리를 그 어떤 연쇄 반응의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나게 해주는 간편한 다목적 도구다. 이 간단한 질문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힘을 지닌 질문이 바로 “왜?”다. 오히려 필요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다른 사람들의 것과 융합하면서, 더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소속감을 위한 거짓말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이러한 갈망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보호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우리 종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했다.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할 때,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보다 쉽게 수적 우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존 차원에서 우리의 몸은 ‘어딘가에 속하는 것’을 갈망하도록 뇌과학적으로 진화해왔다.

 

우리는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입장을 정하기 전부터 특정한 관점에 정서적 선호를 드러내거나 호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순응 편향이 곧잘 작용한다. 귀속집단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결론을 강화하는 것에 불과한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공유하고 있는 감정이 클수록,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귀속집단의 관점에 순응하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이미 특정 귀속집단에 시간과 에너지, 믿음을 투입한 다음이라면, 그래서 그 소속감이 우리의 정체성 중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면, 그 집단의 관점을 우리는 기꺼이 보호하고자 한다.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집단적 관점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귀속집단 바깥에 있는 이를 향해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적 관계에 손상을 입든 물리적 부상을 입든, 우리의 뇌는 동일한 경고 신호를 발산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고통은 허리와 척추의 통증 및 심지어 출산의 고통과도 관련성을 보인다. 마음의 상처가 마치 다리의 골절상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집단의 의견을 거스를수록 사람들이 그를 덜 따른다는 사실을 발견.

 

의견 일치가 잘 되는 집단일수록 더 빨리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견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

 

나의 패러다임이나 근본적인 가치관, 정체성이 달라졌는지 여부는 상관없다. 나의 개인적 가치가 나의 부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세 가지의 선택지와 마주하게 된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집단에 도전하거나, 제 발로 떠나거나. (후자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도편추방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혹은 세 번째 선택지를 고려해볼 수 있다. 그저 집단이 원하는 바에 항복해 버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상응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균형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이러한 현상을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 불렀다. 인지 부조화는 불쾌한 상황이기에 믿음과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바꾸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데, 대체로는 후자의 길을 택한다.

 

우리의 개인적 믿음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발생하는 첫 번째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의 거짓말을 믿어버리게 된다.

 

선물 준 사람이 속상할까봐 선물이 마음에 드는 척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친절한 말을 들으면 친절한 말을 돌려주는 것은 사회적 상식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되며, 그런 거짓말이 드러나지는 않을지 걱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의 자발적 순응에 과잉 보상을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불안, 수치, 역겨움 같은 강한 내적 감정에 대해 다른 이들이 우리를 꿰뚫어보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내적 분열을 감추는 행동은 조용히 사람을 갉아먹는다. 단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자존감을 해칠 뿐 아니라 건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일이 있다. 만약 우리가 본인이 싫어하는 관점을 지닌 내집단에 머물러 있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잘못 읽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실은 그런 관점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약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수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선호나 정체성에 대해 속이고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복잡한 상황에 놓인다. 집단 착각을 만들면서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더 큰 규모로 진행될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이들을 속임으로써 집단에 그 영향이 미치고, 그렇게 오해가 공유되면서 사회의 진보적 변화가 멈추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생각을 오해하면서 본인의 진정한 시각을 감춤으로써, 사람들은 스스로의 내적 일관성을 해칠 뿐 아니라 실은 본인이 원하는 사회적 변화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지닌 의견에 대해 맹목적으로 잘못된 전제를 깔아 놓는 우리는 자신이 소수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걱정하면서, 당신은 물론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의견이 지속되는데 힘을 보태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자들과 경계선을 긋고 그들을 배제하기 위한 이유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다양성에 대해 덜 관용적이고 근친교배적인 집단이 되며, 다른 이들에 대해 고정관념을 품는다. 우리의 사회적 세계를 흑백으로 칠함으로써 편안함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할수록 그는 더욱 큰 회복탄력성, 관용도, 포용력을 지니게 된다. 또한 이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집단에 속하는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더욱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며, 균형 잡힌 관점을 통해 단일한 집단이 품고 있는 환상에 빠질 가능성을 줄여주는 것이다.

 

달콤한 침묵

내 생각이 집단의 의견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뭔가 실수를 했을 때와 동일한 반응을 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그 실수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바꾸게 된다.

 

우리에게는 집단의 합의된 의사로 여겨지는 무언가에 맞춰 순응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본능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합의의 함정은 집단 착각의 유형 중 하나다. 거짓말이 아니라 침묵을 타고, 오해의 먹구름이 우리 모두를 잠식할 때까지 퍼져나가는 것이다. 침묵의 합의는 극히 위험하다. 우리 스스로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 채 집단을 따라가게 되니 말이다.

 

‘밴드웨건 현상(어떠한 선택이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인식하면, 그 선택이 옳다고 믿는 경향)’

 

침묵은 실질적인 해를 끼친다. 그것도 다양한 방면에서 해를 끼친다. 단기적으로 볼 때 침묵의 거짓말은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또한 침묵은 우리가 속한 집단을 새롭고 중요한 정보로부터 차단하며, 어쩌면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해를 끼치고 있었을지 모르는 기존의 정설을 강화하고 만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의 침묵은 집단 착각을 만들고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집단적인 괴롭힘 속에서, 상대방이 하는 것처럼 폭력적으로 굴지 않더라도,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발언하는 대신 입을 다물어 버리겠노라 마음먹는 순간 우리는 침묵의 나선으로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침묵의 나선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끌어당기다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말끝을 흐리며 핑계를 대도록 만든다.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명백한 억압, 불공정한 관행과 규칙 따위에 보이지 않는 찬성표를 던지고 마는 것이다. 침묵의 나선은 이렇게 커진다. 이렇듯 구조화된 현실 부정은 결국 너무도 일반화된 나머지 사회의 규범이 되어버리고 만다. 불의가 용납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침묵하는 우리는 모두 적극적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의혹의 씨앗을 심을 때는 진실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본인이 믿지 않거나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반대 의견을 집단 앞에 제시하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딜레마

작은 카멜레온

집단의 의견에 순응한 사람들의 뇌의 시각 시스템에 실제로 물리적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그 사람들이 실제로 보고 있는 내용 자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니 집단에 순응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던 셈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통제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이라 부르는 그런 착시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우리 인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 가장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독특한 사회적 성향 덕분에 우리 인류는 다른 그 어떤 종과도 비교 불가한 수준의 협력을 해내며 번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외톨이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마저 믿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인 동물인 것이다.

 

거울 뉴런은 본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흉내 내는 것을 본래 기능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관찰한 것을 수용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모방은 우리 인간을 규정짓는 본질 중 하나가 되어 있다. 너무도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아예 따로 이름이 붙어있을 정도다. 이름하여 ‘카멜레온 효과chameleon effect’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비교를 통해 달성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자신을 타인과 비교한 후 그 결과에 기반을 두고 보상을 내놓도록 만들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예측 작용 역시 타인과 스스로를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는 과정에 일정 부분 의존하고 있다. 좋건 싫건 우리보다 더 낫거나 열등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비교의 기폭제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만, 우리의 추론 방식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에 따라 우리의 행동 역시 영향을 받게 된다.

 

사회적 규범을 따라

혐오Revulsion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자신을 해로운 것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우리의 뇌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인 것이다. 그러니 역겹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규범 준수에는 뇌도insula라는 부위가 할당되어 있는데, 규범의 위반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 느낌을 역겨움으로 인지하게 되어 있다.

 

오류의 왕국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올바른가? 전혀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겪은 작은 사건은 우리 스스로가 집단 착각에 빠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 착각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어 일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다른 이들의 의향을 잘못 읽는 것만으로도 그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묵은 규범들은 우리를 집단 착각의 길로 이끈다. 게다가 우리 스스로가 그 길에 세워놓은 이정표들은 엉망진창이다. 사람의 마음을 올바로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심지어 오래도록 알아온 사이에서조차 그렇다. 마치 우리 스스로가 그렇듯, 다른 사람들 역시 사회적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행동을 바꾸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흔히 ‘반복 편견repitition bias’이라 부르는 이상한 행태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한마디로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이야기가 참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 현상이다. 심지어 그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도 반복 편견은 발생할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본심을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무지막지한 정보의 폭풍, 부풀려진 소수의 목소리, 우리의 두뇌에 내장되어 있는 인지적 지름길 등으로 인해, 우리는 사실 함께 나누고 있는 가치를 깨닫지도 되새기지도 못하고 있다.

 

회복력 수업

일관성이라는 미덕

부조화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하며 결국 부정직한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왜 했는지 교묘하게 뒤바꿈으로써 스스로의 행태를 합리화한다.

 

실제로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요소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지문처럼 개별적이고 고유한 속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완성된 성취감을 얻는 실질적이고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본인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잘 해나가는 것, 말하자면 조화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낯선이를 향한 신뢰

우리는 길 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전을 하고 다닌다. 우리가 따르는 도로교통법과 규칙을 다른 사람도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수많은 상호 신뢰가 얽혀서 작동하는 덕분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남을 더 많이 믿는 사람일수록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그 반대가 참이다. 캐나다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고신뢰자’들은 ‘저신뢰자’들에 비해 남의 거짓말을 더 잘 잡아내고 있었다. 저신뢰자들은 모든 이를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고신뢰자들이 타인에 대해 내린 판단과 신뢰는 현실에서 검증받게 된다. 그렇게 쌓인 경험으로 인해 고신뢰자들은 거짓말을 알아채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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