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보통날
2011. 1. 14. 01:58 잡담아침에 일어난다. 일어나면 침대는 항상 난장판이 되어있다. 꽈배기라도 만들어 놓듯이 이불은 돌돌 말려있다. 어제 저녁에 늦게 잠을 잔 탓에 눈을 떴을 때는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10시 즈음이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연수원 사전 학습을 했다. 총 4시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벌써부터 세뇌를 당해 충성심이 생길 정도의 온라인 교육이었다. 연수원에 들어가게 되는 입사일까지 4일정도 남았기 때문에(1월 13일 기준) 현재는 백수 놀이를 하고 있다. 오늘의 백수 놀이를 잠깐 살펴보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을 켠다. 컴퓨터와 지내는 시간은 하루의 반 이상(12시간)을 차지하는 듯 하다. 그건 아마 초등학교 3학년, 586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최고의 사양이었던(S전자의 매직 스테이션 3였다.), CPU가 펜티엄 80Mhz, RAM은 8MB, HDD는 무려 128MB 정도에, 가격은 300만원대였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부모님께 억지를 부렸는지. 고등학교때쯤 크게 반성을 했었다. 그래도 그 덕에 이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컴퓨터 중독이었다. 지금도 아침 10시에 컴퓨터를 켜서 단 한 차례도 끄지 않았다. 대단하다. 예전엔 하도 컴퓨터를 켜놓고 다녀서 파워 서플라이(Supply)만 여러번 갈아치웠다.
컴퓨터를 켜놓고 나선 책상 위에 놓여진 안경을 찾아 쓰고 집안을 한번 살펴본다. 아버지는 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대전에 내려가 계신지 3일째 되신다. 어머니는 출근을 하시면서 미션을 내린다. 첫째, 빨래를 할 것. 둘째, 밥을 잘 챙겨 먹을 것, 셋째, 분리수거하는 날이니 분리수거를 할 것. 기타 등등등. 아들만 보면 시킬 일이 생각나시나 보다. 어머니가 출근하신다.
부엌에 가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병째 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입을 안 데고 마시려고 하다 셔츠에 물을 적시고만다. 왼팔로 스윽스윽 훔쳐내고는 거실에 가본다. 동생이 TV를 켜놓았으면 TV 프로그램이 뭘하나 한번 쓱 쳐다보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동생님 역시 백수 놀이중이다. 동생은 지난 해 9월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나서 고깃집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11월인가 12월에 고깃집 주인이 바뀌는 바람에 알바 자리를 뺏기고 나와 같이 백수 놀이를 하고 계시다. 백수 놀이에 있어선 달인이다. 어떻게 하루 종일 집에서 있을지 신통할 정도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제 진정한 하루의 시작이다. 재빠르게 구글 Talk, 네이트온 메신져를 켠다. 데스크톱 Twitter 클라이언트인 TweetDeck을 켜고, 내게 온 멘션, DM, 친한 사람의 트윗 리스트를 살펴본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Facebook에 접속하고 알림을 확인한다. 요즘엔 Facebook에서 머물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적당히 하라고 핀잔을 할 정도이다. Twitter나 Facebook에 들어 가면 온통 내 글이란다.(백수 놀이 중이니까 이해해주십시요. 조만간 타임라인에서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폭풍같은 웹 서핑과 메일 확인, 관계 유지를 하다 금세 점심 시간이 된다. 내 배꼽 시계의 알람이 밥을 달라고 울려주신다. 반찬을 살펴본다. 어제 먹다 남은 쇠고기 무우국이 있다. 무우랑 양파가 너무 달아서 국에서 단맛이 심하게 난다. 방법을 모색하다가(어제는 후추 잔뜩 넣었다가 실패) 고춧가루를 넣어 먹어 보기로 한다. 으음~ 맛집 블로거 3년이면 식당을 차린다고 했던가(누가?) 나름 괜찮은 맛이 탄생했다. 만족스럽다.
다시 컴퓨터에 앉는다. 사실 이쯤되면 더 이상 할 게 없다. 구독하는 뉴스/블로거 피드를 살핀다. 지난 번에 연말 결산 2010 베스트 블로그 피드를 좀 추가해줬더니 하룻밤만 지나면 보통 40개의 새로운 글이 올라온다. 관심있는 포스트만 눈 여겨 본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현 시대의 사람들은 뉴스를 편식하고 있다고, 꼭 신문 하나를 정독해야 폭 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충고했다. '그래, 신문을 보자!' 마음을 먹지만 우리 집 신문은 조중동 중 하나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정치성향이 들어났다. 보통 정치 얘기를 하면 아버지와 많이 다투게 된다. 정치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갖고 있던 2~3년 전쯤엔 말 다툼이 많았다. 그 후론 아버지 앞에서 내 색깔을 띄우지 않는다. 다만, 1년에 두 번 정도는 의견을 말한다. 바로 나의 지원군, 둘째 큰 아버지와 함께일 때이다. 둘째 큰 아버지의 정치적 소견과 내 의견은 거의 일치한다. 그 점은 다행이다. 하지만, 둘째 큰 아버지와는 종교 문제로 언쟁이 벌어진다. 이래서 명절에 정치, 종교 얘기는 하면 안 된다고 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곧 구정이 다가온다. 전투 준비를 하자(?).
블로그 구독도 끝났다. 무엇을 할까 고민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냥 두어시간 멍하니 TV를 볼까, 책을 볼까, 게임을 할까.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것들을 두고 고민을 한다. 오늘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 모음집을 폈다. 10장쯤 읽으니 집중이 안된다. 책도 음식과 같은지 과독(?)을 한 다음 날에는 잘 읽히지 않는다. 어제 하루만에 책 한권을 뚝딱했더니 오늘은 잘 읽히지 않았다. 음악을 틀었다. 좋아하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튼다. 이내 지겨워져 재생목록을 고쳐본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미드를 틀어본다. 얼마 전에 받아 둔 Office를 재생시켰다. 한 회를 보고 나니 금세 지루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밖에 나가 활동을 해야 하는 날인가보다. 이렇게 방 안에서 가만히 있는게 싫은 걸 보니, 결국 거실과 방을 계속 어기적어기적 드나들었다. 날이 추운 탓에 밖에 나가기가 꺼려지는데 움직이고는 싶었나 보다.
시간 참 안 지난다. 고작 3시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어쩔 수 없다. TV 앞에 누워 몸을 지져주는 수 밖에. 지겹게 본 무한도전, 1박2일, 남자의자격, 천하무적야구단. 미친듯이 채널과 눈동자를 돌린다. 보통 이쯤에서 한번 졸아주는 것도 내 몸에 대한 예의인 것을. 이상하게 오늘은 졸리지도 않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저녁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쇠고기 무우국을 세끼 연속 먹을 수는 없어 냉장고를 뒤져본다. 몇 일 전에 사다 놓은 냉동 치킨까스와 어제 어머니가 해두신 고등어 김치찌개가 있다. 저녁 메뉴는 점심과 다르게 먹는 소소한 즐거움에 웃으면서 식탁에 앉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시 TV 앞에 앉았다. 《블레이드 2》가 한다. '와, 이게 언제적 영화야'라고 하면서 몰입한다. 분명 두 번 이상은 봤을 텐데 새롭다. 견자단도 나오고, 《헬 보이》의 론 펄먼도 나온다. 내가 왜 이 당시에 견자단을 몰라 봤을까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 현재 유명했던 배우들이 과거 영화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까도 《스파이더맨 3》가 하는데, 피터(토비 맥과이어)가 MJ(커스틴 던스트)의 뮤지컬을 보러 가서 객석에 앉는 장면이 나왔다. 그 뒤에 보이는 흑인 여자가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의 친구로 나온 사람이었다. 아.... 나 참 별거 아닌 거 발견하고 좋아하고 있구나.
어쨌거나 의미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를 의미없이 보낸 것 같아 의미를 부여하고자 포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새 글을 쓴 지 40분째다. 막상 오늘 하루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하루를 표현하고자 하는 글이 굉장히 길어졌다. 게다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기 위해 뇌를 뒤지다보니 뇌가 조금 활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의미없는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된다. 지금도 1월의 한 보통날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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