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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스크랩]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2026. 4. 24. 00:25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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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 R.D.프레히트 - 교보문고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 독일 아마존 철학 분야 부동의 1위‘철학의 나라’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자 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베스트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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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을 던지는 것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소중한 능력이다. 충족된 삶의 비밀은 배우고 즐기는 데 있다. 배우기만 하고 즐길 줄 모르는 삶은 슬퍼지고, 즐기기만 하고 배울 줄 모르는 삶은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동물과 다른가?

니체의 위대한 업적은 비판 정신에 있다. 그것도 역동적이면서도 인정 사정없는 비판이다. 인간 스스로 만든 방식의 논리와 진리에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고 무지한 짓인지를 니체는 그 이전의 어떤 철학자보다 더 열정적으로 보여주었다.

 

니체는 인간이란 사실상 동물에 불과하며, 인간의 사고를 규정짓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충동과 본능, 원초적 의지 그리고 제한된 인식 능력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 이유에서 당시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을 아주 특별한 존재, 즉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자기 자신과 객관적 실재를 정말로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모든 인식은 무엇보다 우리의 감각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들을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느낄 수 없는 것, 맛볼 수 없는 것, 그리고 더듬어 볼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감각적인 인식 대상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은 우리 인식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추상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부호 또는 상징으로 읽어 내거나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계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동물에게나 볼 수 있는 초인간적인 감각기관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잠재력의 아주 일부분만 사용하고 있다. 지능이란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우리가 작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나의 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신경 전류가 뇌와 척수를 통과하는 길에서는 항상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시냅스는 하나의 신경세포와 정보를 교환하고 그 결과를 또 다른 신경세포의 시냅스에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신경 전류의 이동 경로는 일방통행이며, 신호가 흐르는 방향은 언제나 불가역적이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이 우리의 관심을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꾸로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느낌과 생각으로 규정한다. 때때로 많은 일이 아무리 빨리 연속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 이라는 것도 한 번에 몇 개의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을 앞뒤로 전환하여 빨리 처리함을 의미한다. 이때 우리의 주의력이 미치는 범위는 몇 배로 제한된다. 더욱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에 생물학적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뇌의 신경세포 중에서 일부만을 사용하는데, 이 사용 부분을 확장하기 어렵다고 하는 주장은 옳다. 말하자면 우리의 주의력은 뇌의 제한된 활동 범위에서만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에 주의력을 가지면 다른 일에는 항상 소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내가 아는가?

'사유하는 나'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합리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데카르트는 거의 400년 전보다도 더 현대적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뇌와는 별개로 생각한다거나 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당연히 인정하고 있다. 뇌가 생각하고, 그리고 뇌가 또한 내 자아를 생성하며, 그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와 세계의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해결했다. 즉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요소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뇌 속에 나타나면, 우리는 이를 감각'이라 부를 뿐이며 더 이상 특별한 의미는 갖지 않는다.

 

인간의 뇌 속에는 내(자아)가 없었다. 외부 세계의 요소들과 활발한 정보 교환을 하며 생긴 산더미 같은 감각만이 뇌 속에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마흐가 농담조로 표현한 것처럼, “이 세계를 산책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감각뿐이었다.”

 

자기라는 개념은 의지와 판단의 중심부라는 뜻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판단할 때 그 중심이 된다는 의미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관'과 '자기 가치 의식'을 구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관이란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의미합니다.

 

철학은 자아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미확정으로 내버려 둔다. '자아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아를 알고 있다'는 것이 철학에서의 격언이다.

 

단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태에 따른 자아, 즉 '자아 상태가 다양하게 수없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아 상태'의 여러 가지 예를 한번 살펴보자. '육체-자아'는 내가 더불어 살아가는 육체가 실제로 나 자신의 육체임을 인지해 보살펴 준다. '위 치 설정-자아'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고, '관점-자아'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내가 그 중심이라는 것을 전달해 준다. '체험 주체로서의 자아'는 내 감각적 인상과 감정은 실제로 나에게 고유한 것이고 또 타인의 것이 아님을 말해 주며, 저작자-자아와 통제-자아'는 내 사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임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 ‘자서전적 자아’는 내가 인생이라는 나 자신의 영화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즉 내가 예외 없이 동일한 사람으로서 나를 체험하도록 보살펴 주고, ‘성찰적 자아’는 자기 자신에 관해 심사숙고해 '주체적 나'와 ‘대상으로서의 나’와의 심리적인 게임이 가능하게 해 준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자아'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말해 주는 양심과도 같은 무엇인가를 길러 준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감정과 이성은 적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며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서로 보완적이다. 정신이 활동할 때 감정과 이성은 서로 파트너 관계다. 때로는 서로 신뢰하다가도 종종 엄청난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절대 서로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서로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감정이 이성을 완전히 배제하며 나서기도 한다. 그렇지만 감정이 배제되면 이성은 문제를 일으킨다. 먼저 감정이 사고의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출발점이 없다면 사고의 움직임도 없다. 또한 의무감이 없다면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스폭도 없을 것이다.

 

’정서(Emotion)‘라는 단어는 약간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그 어원은 라틴어 움직이다(movere)에서 나왔다. 그래서 정서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 즉 감정을 의미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두 가지 문제뿐이다. 내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무엇을 피하고자 할 것인가, 둘 중 하나다. 이것은 단지 외적인 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감정은 외부 자극에 걸맞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인 상태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 신경 쓴다.

 

아세틸콜린은 많은 신경전달물질 가운데 운동선수와 트레이너 같은 존재다. 이것은 신경세포와 근육 사이의 자극을 전달해 주며, 땀샘을 활성화하기도 한다. 아세틸콜린은 분명히 학습 과정에 참여하는데, 아세틸콜린이 급격하게 사라지게 되면 생기게 되는 알츠하이머병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다.

 

도파민은 선동가이자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과 같은 존재다. 도파민은 혈액을 공급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며,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혈압이 매우 낮다면 도파민으로 혈압을 상승시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며 호르몬과 관련해 정신병이나 여타의 장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도파민의 양이 지나치게 많으면 정신분열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세로토닌은 외교관이자 중재자와 같은 존재다. 세로토닌은 혈액순환에 영향을 미치고, 혈압을 조절해 준다. 또한 이 물질은 폐와 간에서는 혈관 수축에 영향을 미치고, 이에 반해 근육 조직에서는 혈관 확장에 영향을 끼친다. 그뿐만 아니라 세로토닌은 취침과 기상 리듬을 조절해 주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를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 세로토닌의 조절이 뒤죽박죽 되면, 원초적 현상도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로토닌의 분비가 증가하면서 평안함과 만족감을 전달해 준다. 이에 반해 세로토닌이 부족한 경우에는 편두통과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

 

노르아드레날린은 자동차 경주자이자 가속기와 같은 존재다. 이 물질은 주로 동맥에 영향을 미치는데, 도파민과 마찬가지로 혈압 상승에 관여한다. 응급실과 같은 집중 진료가 요구되는 곳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은 쇼크 치료제로 사용하기도 하고, 약물중독으로 급격한 마비 증세가 나타날 때 혈액순환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이 의식을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173 년 프시케를 세 개로 나누었다.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이 세 개의 심급은 인간의 영적인 삶을 규정한다. 프로이트는 프시케를 이렇게 세 개의 심급으로 나눈 것을 자신의 고유한 업적으로 간주했다. 비록 니체가 이미 이 세 가지 개념을 유사한 기능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이드는 무의식적이고 인간 프시케의 충동적인 요소들에 상응하는데, 배고픔, 성적 충동, 시기, 증오, 신뢰, 사랑 등등이 이 이드를 규정한다. 이드의 반대쪽 상대는 초자아다. 초자아는 인간이 교육을 통해 형성된 가치들, 즉 규범, 이상, 역할, 주체상과 세계상 등을 실현한다.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 자아가 놓여 있는데, 자아는 사실 매우 가련한 녀석이다. 이드와 초자아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강력 한 두 상대에게 끼어 몸이 찢겨 나갈 정도로 불쌍한 존재다. 물론 자아는 이드, 초자아, 사회적 환경이라는 세 주인의 신하로 이들의 상반된 요구에 의해 파생된 갈등을 해결하고 조화되도록 시도하지만, 그 시도는 상당히 미약하다. 보통 이드가 승리를 쟁취하는데, 이 이드는 자아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이드는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유아기에서 유래하는 무의식적 충동과 그 특징은 파악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정리할 수도 없다.

 

충동적 자극과 그 자극에 과하게 요구되는 이성 사이의 무의식적 갈등에서 인간 행동의 주요 동기 부여가 파생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기 주장을 개별적인 인간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충동 역학에도 일반적으로 확대 적용했다.

 

무의식적인 것은 매우 다양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잠재의식으로 체험하는 과정도 무의식적이다. 우리 지각은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인상이나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주의를 끄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 중에서도 일부만 해당하고, 그 나머지는 무의식 상태로 이전되기 때문이다. 무의식 상태로 이전된 것 중에서 대부분은 비밀스럽게 저장되고 나머지 다른 것은 저장되지 않고 사라지는데, 이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눈앞의 실제적인 과제나 목표 또는 욕구에 상응하는 것을 겨냥해 이를 인지 대상으로 삼는다.

 

무의식이 의식을 통제하는 힘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하다. 인격 발달에서도 무의식이 의식에 앞서서 형성되고, 무의식은 의식이 점차 깨어나기 훨씬 전에 특질을 결정한다. 무의식적 체험과 그 능력의 총합, 즉 잠재의식은 우리가 거의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잠재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가장 친숙한 방법은 외부에서의 도움이며 치유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을 이 책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편에서는 개별적인 단어들을 이해해야 하고, 즉 그 단어들을 다시 인식해야 하고, 동시에 전체 문장의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전에 읽었던 문장들을 글자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본질적인 의미를 기억한다면 독서에서 매우 유리하다. 나는 ’의미‘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 숨어 있다. 즉 독서할 때 (통상적인 경우) 단어나 문장을 뇌 속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에센스나 또는 그것들이 갖는 의미를 저장한다. 이런 사정은 단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일에도 해당한다. 잘 아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외워서 그려 낼 수 있는 사람은 극 소수다. 심지어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라 하더라도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체험한 것을 대부분 망각하곤 하는데, 이것은 당연하게도 평범한 사람의 장점이기도 하다. 회상은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지만, 망각은 인생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언어란 무엇인가?

자신의 사고와 추론이 언어라는 수단에 종속돼 있다는 것

 

‘정확한 언어’는 그 단어 의미만으로도 비인간적이다. 즉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혁명과 언어의 근본적인 기능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언어 발달의 원동력은 진리와 자기 인식에 대한 동경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오히려 그 원동력은 의사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필요성이다.

 

적어도 생후 처음으로 접하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배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언어는 사회적으로 '흉내 내게' 된다. 처음으로 접하는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상대를 이해하고 또 상대로부터 이해받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이해할 만한지 또는 아닌지 여부는 문법뿐만 아니라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

고독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아무도 자기와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으며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푸는 동정심의 결여보다 자신을 더 좌절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동정심의 결여라는 주장이 있다. 누군가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더 괴로운 일이다!

 

고독한 사람 중에서 많은 이는 자신의 존재 속에 일종의 광장공포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세계를 너무 좁게 설정해 놓아 유연성도 있고 융통성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의 영향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감정을 비교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많은 부분을 그릇되게 평가한다.

 

나는 왜 선해야만 하는가?

자연의 질서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간에, 그 질서는 우리 뇌 속에 정리돼 있는 것이다. 색채를 만들어 낸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시신경인 것처럼, 인간의 정신이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 내 이를 자연에 덧씌워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세상을 구성하는 인지 도구와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성은 자신의 법칙을 창조하는 데 있어 자연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지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행하려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믿음은 칸트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서, 그는 인간에게 아주 특별한 칭호. 즉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을 부여했다.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은 특별한 존재이므로 그 자신을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사실상 없다. 모든 다른 생명체는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견해를 밝혔다. 인간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선한 행동을 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선한 행동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원할 수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원할 수가 있는가?” 이 질문은 하나의 커다란 도발이었다. 이 질문에는 매우 많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원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모든 것은 사실상 끝장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의지도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이성은 사실상 전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언적 명령에는 무슨 일이 있으며, 나의 이성이 내리는 '도덕적 법칙'에는 무슨 일이 있는가? 정언적 명령은 완전히 중요치 않게 된다. 나의 행동에 대한 법칙을 규정하는 것은 이제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뇌의 명령 통제 본부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이다. 의지는 무의식적인 것이며, 무의식적인 것이 우리의 현존재와 성격을 규정한다. 의지가 주인이며, 그리고 이성은 그의 노예다. 의지가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은밀하게 종결짓는 자리에 이성은 배제된다. 이성은 자신이 배제된 상태에서 오랫동안 진행되는 것이 있어도,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지 의지만이 내게 말해 주며, 이성은 의지를 따른다. "마음이 싫어하는 것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이다.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잡담일 뿐이다!

 

도덕은 뇌 속에 존재하는가?

오늘날 뇌 연구자들은 매우 많은 상이한 뇌 영역이 우리의 감정과 결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 과정이 아주 정확하게 진행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감정, 추상적 사고,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담당하는 뇌의 영역은 언제나 동시에 움직인다. 여기에서 누가 무엇에 관해 결정하는지는 거의 말할 수 없으며, 어쩌면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것이 항상 동일하지도 않다. 분명히 감정과 이성은 서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 매우 상이하게 반응한다.

 

선한 것은 보답을 받는가?

미러(거울) 뉴런은 뇌 속에서 어떤 행동을 수동적으로 공감할 때 그 행동을 실제로 행할 때처럼 똑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신경세포다.

 

뉴런의 이해가 인간의 동정심이나 언어의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도덕에도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미러 뉴런이 자기 행동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할 때도 번쩍거리며 반응을 보인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능력은 자기 지각 능력에 달려 있다고 추정해도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민감하다는 전제조건을 갖추고 있다. 말했다시피 이것은 전제조건일 뿐이며, 그 사람이 그것을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물론 전혀 다른 문제다.

 

다른 사람의 미소와 환한 얼굴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답이다. 그러니까 선을 행하면 종종 기분이 좋아지는데, 특히 자기 선행의 결과를 이웃 사람의 얼굴에서 볼 수 있을 때, 아니면 최소한 상상할 수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이타적인 행동은 크게 보면 자기만족에 기인한다. 선한 행위는 나 자신에게 유익하며, 개개인에게 유익하게 되면 결국 공동체에도 유익하다.

 

도덕은 타고나는 것인가? 길러지는 것인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칼로 사람의 심장을 찌르는 것보다 단추를 누르는 것이 훨씬 쉽다고 생각한다. 잔인한 행동도 추상적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행복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 이 주장이 옳다면 철학과 국가도 당연히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 사회 목표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고통의 양을 가능한 한 감소시키는 데 있어야 하며, 또는 모든 사람의 행복 아니면 최소한 대다수 사람의 행복을 늘리는 데 있어야 한다. 어떤 조치로 세상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면 줄수록, 그 조치는 그만큼 더 유용하고 좋은 것이다. 이러한 기본 원칙을 벤담은 공리주의라고 불렀다.

 

“한 인간의 생명은 다른 인간의 생명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낙태는 도덕적인가?

선행을 행하려는 내 의지는 개별적인 가치 결정, 즉 논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개별적인 판단이다. 도덕적인 규칙을 위한 최후의 토대는 도덕 주체의 소망과 의지이지 인식이나 지식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은 감각적인 경험의 문제이며, 또 감정으로 불타오르는 상상력의 문제다.

 

안락사는 허용하여야 할까?

살인할 자격을 다른 누군가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관한 결정권을 포기하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으로부터 타인의 처분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동물을 먹어도 될까?

싱어는 이 책에서 어느 생명체가 지닌 삶의 권리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지능이나 이성, 분별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갓 태어난 젖먹이는 돼지보다 분별력에서 뒤지겠지만, 우리는 아기를 먹거나 새로운 샴푸의 효능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남용하지 않는다. 어떤 생명체를 존중하고 그 삶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그 생명체가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물에 비해 몇몇 동물에게 감정을 더 쉽게 이입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이를테면 인간이 돌고래를 관찰하고 있으면, 돌고래의 표정에서 즉시 미소를 연상하게 된다는 점 등이다. 우리가 돌고래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거울 뉴런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돌고래와 공감한다고 느낀다. 반면에 '낯선' 얼굴을 지닌 동물은 우리의 거울 뉴런에 자극을 주지 않는다. 낯익은 것으로 인지할 수 없으면, 우리의 감정이입 능력도 냉담해진다.

 

도덕은 항상 문화적 감수성의 문제다. 따라서 도덕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이 제시하는 추상적인 정의가 아니라 한 사회의 감정 상태다.

 

왜 자연을 보호해야 할까?

어떤 철학자나 어떤 생태학자도 이 행성에 수백만에 달하는 그 모든 동물 존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실제 설득력 있게 근거를 대지는 못한다. 그러나 철학자도 엄청나게 철학적 사유를 소모하지 않으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거는 인간이 고통과 행복을 느끼는 복합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고래와 코끼리에도 통용된다면, 그들을 죽여서도 안 되고 그들 삶의 근거를 파괴해도 안 된다는 주장이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그들이 회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삶에 대한 애착을 지녔기 때문이다.

 

내가 희망해도 좋은 일은 무엇인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을 원인과 결과의 논리로 설명한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은 인과율적 신 존재 증명이다. 세계는 존재하므로 언젠가 세계는 생성할 수밖에 없다. 무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최초의 작용인이 모든 것을 창출했거나 움직이게 만들었다. 따라서 모든 것의 시초에는 아퀴나스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차용한 개념인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 하지만 이 부동의 원동자를 어떻게 상상해야만 할까? 근본적으로 그것은 상상할 수 없다. 부동의 원동자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소유하지 않는 그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 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진실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적이고 완벽해야만 한다. 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상상을 조금씩 지워 나가야만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상상을 버리면 버릴수록 자신을 두르고 있는 어둠도 그만큼 걷히는 법이다! 나는 질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시간과도 연관되지 않는 존재를 생각해야만 한다. 신은 전능하고 전지적이며, 신은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다. 신의 의지는 절대적이고 완벽하며, 신의 사랑은 무한하여 행복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논증에 의해 많은 신학자가 그때그때 주장하는 신 존재 증명을 거부해 왔다. 개신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신 존재 증명을 가지고 신의 실체에 대해 무엇인가 증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영을 논의하는 것이다" 하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척추동물의 뇌는 초감각적인 것으로의 직접적인 통로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며, 더 이상 초감각적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항상 그렇듯이- 경험될 뿐이거나 아니면 경험을 못할 뿐이라는 것이 바로 사태의 본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회 체계는 생명체의 물질과 에너지 대사의 교환에서가 아니라 의사소통과 의미의 교환에서 이루어진다.

 

의사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이란 단순히 정보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 하나의 체계를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관여하는지는 시종일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는 물음만이 결정적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박테리아처럼 물질과 에너지, 뇌처럼 뉴런의 활동이 상호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상호 교환된다. 그렇다면 기대는 어떻게 교환되는 것일까? 어떤 기대들이 발생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무엇이 생겨나는 것일까? 다른 말로 설명하면, ’지속적으로 안정적이고, 다른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현대적 사회 체계가 생겨나도록 어떻게 하면 의사소통으로 기대를 창출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적 문제인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적 사회 체계에는 정치, 경제, 법, 학문, 종교, 교육, 예술 또는 사랑을 포함한다.

 

따라서 사랑 역시 기대로부터 형성된 하나의 사회 체계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지속적으로 기대되면서 확고하게 명문화된 기대는 바로 코드(Code)인 것으로, 사랑 역시 코드에서 형성된 것이다.

 

‘자기표현’을 행하는 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곧 사랑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이는 매우 진기하고 이런 이유로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의사소통의 형식이지만, 어쨌든 비정상적인 방식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타인의 행복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는‘ 아주 정상적인 비개연적 성격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보고 있는 타인의 모습도 사랑을 하게 되면 완전히 변화하며, 따라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평소의 정상적인 관찰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대를 서로 일치시키는 과정은 매우 불안정하다. 사랑의 과정은 완전히 환멸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코드 중에서 하필이면 가장 깨지기 쉬운 코드가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관한 기대가 안정적이라고 확신하면 할수록, 사랑의 긴장 관계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만큼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완벽하게 조율된 서로의 기대는 신뢰할 만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짜릿함을 잃는다. 서로의 기대는 자극을 결정하는 바로 비개연적인 성격을 눈앞에서 사라지게 한다. 루만에 따르면 이 때문에 사랑을 감정, 성적인 욕구와 덕성의 통합으로 보는 낭만적 이념은 언제나 과도한 요구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비록 순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이미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To be is to do) - 소크라테스

 

행동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To do is to be) - 사르트르

 

행동하든 존재하든 그것이 그것이다 (Do be do be do) - 시나트라

 

우리에게 재산은 필요할까?

소유권에 대한 관념은 타인이 개입했을 때만 문제가 된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나는 내 핸드폰에 대해 그것은 내 것이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핸드폰에 손을 대면 그것은 내 소유물이라고 설명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소유권이란 바로 인간과 사물 사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물에 대해 인간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인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심리적 관계, 따라서 나에게 속하는 사물에 대한 ‘사랑’은 인간 정신을 밝히는 분야에서 가장 소홀히 되어 온 주제 중 하나다. 이는 사물에 대한 사랑, 즉 '즐겁게 획득한' 대상에 대한 욕망과 소유욕이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만큼 놀라운 일이다.

 

결국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법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소유는 비교적 자신을 정서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비록 사회적 확장 가능성이 희생될 수도 있지만- 안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소유권자에게 요구되는 희생은 이제까지 심리학에서는 소홀히 다루어 온 것도 사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복지란 그에게 가장 이성적인 장기 계획으로서 어느 정도는 유리한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이 계획을 이행하면서 몇 가지의 결실을 얻는다면 행복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선한 것은 이성적인 요구를 만족시킬 때 이루어진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내 행복은 나 자신과 가장 깊이 일치하는 순간 - 루트비히 마르쿠제

 

지속적인 행복은 기대가 현실적일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행복과 불행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행복과 불행의 문제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달려 있다. 이는 자신의 기대를 어떻게 노력해 이룰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연관된다.

 

루트비히 마르쿠제가 행복의 공식으로 말한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것’이란 자신의 기대와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물론 내가 바라는 다른 사람의 기대도 포함한다.

 

행복은 배울 수 있는가?

행복해지기 위한 첫 번째 원칙, 그것은 무엇보다 활동성이다. 우리의 뇌는 쉬지 않고 몰두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 정신적으로 정체돼 있으면 기분도 나빠진다. 단 하루만 쉬어도 뉴런은 연속해서 마비되는 현상을 보 인다. 어떤 일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위축되면서 불쾌감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 걱정한다. 우리의 호르몬 관리 체계는 도파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상당히 큰 곤경에 빠진다.

 

우리는 쉬지 않고 활동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활동적인 것은 행복한 상태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복에 이르는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스스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거의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인 연대보다 더 지속적인 행복의 원천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정이나 파트너 관계, 가족은 안전하다고 느끼는 틀을 만들 수 있다. 파트너와 친구, 아이들과 어떤 일을 공동으로 체험하게 되면 행복 지수는 상승한다.

 

행복을 위한 세 번째 원칙은 집중력이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현재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꽃향기, 형태의 아름다움, 치즈 한 조각의 맛 등이 얼마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인지를 자주 언급했다. 관심 있는 대상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집중하면 삶의 행복도 그만큼 높아지며, 사물에 유효한 것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자신이 침잠하는 모든 일에는 자신을 아낌없이 다 바쳐야 한다. 좋은 식사를 하면서 살이 찔까 봐 걱정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계속 시계를 본다면, 이는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일 것이다. 이따금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끊임없이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빼앗아 간다. 현재는 외면하고 뭔가 다른 계획을 세우려고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이 대다수 보통 사람의 인생사다.

 

행복을 위한 네 번째 원칙은 현실적인 기대다. 행복은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가장 빈번하게 저지르는 실수는 지나치게 기대가 크거나 지나치게 기대가 작을 때에 일어난다. 두 가지 모두 불만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기대가 큰 사람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기대가 너무 작을 경우에는 도파민의 분비가 적기 때문에 의욕상실증과 무관심에 시달린다. 이처럼 열정이 부족한 사람은 계속해서 기대를 낮추게 되어 의욕 상실의 악순환을 맞이하게 된다.

 

행복을 위한 다섯 번째 원칙은 좋은 생각을 갖는 것이다. 아마도 좋은 생각은 행복의 원칙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원칙일 것이다. 행복감에 대해 에피쿠로스와 긍정의 심리학은 견해를 같이한다.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과 감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생각‘이란 즐거움을 가져오는 반면에 불쾌감을 피하는 그런 생각을 말한다.

 

행복에 관한 여섯 번째 원칙은 행복 추구의 태도가 너무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행을 맞이하여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예술이다. 불행의 순간에도 희망이 숨 쉬고 있을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가 더 나은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종종 ‘무엇 때문에 그런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변화의 조짐이 없는 상황과 싸우는 것이 이 세상에 퍼져 있는 수난사이지만, 행복의 심리학자는 그것을 전환의 가능성으로 간주한다.

 

끝으로 일곱 번째 원칙은 일을 통한 즐거움의 성취다. 이 원칙은 행복의 첫 번째 원칙인 활동성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일은 우리가 활동적이 되도록 독려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많은 것을 충분히 해내기 위해서는 일의 압박을 필요로 한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일의 효력이 이런 것이므로, 일이야말로 심리 치료의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도 일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행복이 "사랑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고 말했다.

 

인생은 의미가 있는가?

평생 동안 행복한 삶이라니! 이런 상태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일 것이다. -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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